'여자들 중에는 왜 천재가 드문가? 자신의 능력을 가족과 남편에게 몽땅 쏟아 넣었기 때문일 거다.'
톨스토이 아내 소피아가 남긴 말이다. 세상에 여자의 희생과 도움 없이 되는 일이 있을까.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아직까지 여성은 그 가치만큼 존중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평생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도록 애써온 한국여성정치문화연구소 김정숙 이사장. 그녀는 현재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으로 부임한지 6개월째인데다 한국걸스카웃연맹 총재까지 맡다보니 ‘월화수목금금금’이란다. 휴일이 없는 셈이다. 토요일 오후 안국동 걸스카웃연맹에서 김 이사장을 인터뷰했다.
 ▲한국여성정치문화연구소
김정숙 이사장 -여성과 정치 이 두 단어는 참 멀어요. 어떻게 이를 연결시키는 일을 하시게 된 건지. "37살에 교육학 전공으로 유학을 갔는데, 미국은 우리나라와 너무나 달랐어요. 당시 입후보한 엘리자베스 돌 같은 아름답고 똑똑한 정치가를 보니 참 멋지다 생각했죠. 공부를 끝내고 오니 우연히 공천제의를 받았어요. 미국에서 받았던 여성정치인에 대한 좋은 생각과 남편이 용기를 줘서 정치에 입문하게 됐지요. 그런데 막상 선거를 치러보니 절망하고 말았어요. 부정선거, 상호비방, 지역감정, 남녀차별. 우리나라 정치의 안 좋은 면을 모두 겪었으니까요. 내가 당선되든 안 되든 정치를 깨끗하게,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들어야겠다 싶더군요. 88년 선거에서 떨어지고, 다음해에 한국여성정치문화연구소를 만들었어요. 죽을 때까지 필생사업이 된 거죠."
-사실 지금 이삼십 대 여성들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어요. "많은 이삼십 대 여성들은 커리어 개발, 돈벌이에만 꽂혀있는 것 같아요. 물론 당사자들 잘못은 아니라고 봐요. 공부만 잘하면 일류대학가는 시스템을 기성세대가 만들었으니까요. 하버드, 예일 같은 대학들은 봉사·참여정신이 얼마 만큼인가로 최종합격을 결정합니다. 지금 세대가 부족한 사회참여·봉사정신을 어떻게 갖게 만드느냐가 제 관심사예요."
-여자들이 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하는지 와 닿는 예를 하나 들어주신다면. " ‘우리 엄마는 애 열 낳았는데, 요즘 여자들은 애도 안 낳는 나쁜 여자’라는 비난도 들리던데요, 놀랍게도 여성 사회참여가 활발할수록 출산율이 높아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기를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해서 정책을 만들면 되는 거예요. 돈을 좀 준다고 애를 더 낳겠어요? 그러니 여자들이 똘똘 뭉쳐서 요구할 건 요구해서 제도를 마련해야해요. 결국 정치참여를 많이 하는 것이 경제활동에도 플러스가 되는 걸 너무 모르는 것 같아요."
-여권이 많이 신장됐는데 왜 아직도 그러냐는 시각도 있어요. "결혼한 여자들한테 남편과 자신이 50:50으로 살고 있는지 한번 물어봐요. 아무리 잘 나가고, 많이 배우고, 돈 많은 여자라도 집에 가면 남편, 남편 집안, 남성위주 사회에 눈치 보면서 살아요. 다 오십보백보죠. 때로는 저 역시 내 여권 하나도 못 챙기면서 이러고 다니나 싶기도 해요. 여성은 지구상에 영원한 마이너러티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우리 어머니와 비교하면 지금은 많이 좋아졌잖아.' 같은 시각은 가장 나쁘다는 생각이에요. 세계 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번 봐야 해요. 여성의 평등을 보장하지 않으면, 여성들만 좋아지지 않는 게 아니라 21세기 세계 속에 경쟁력이 없어져요. UN 뉴밀레니엄 개발계획 15가지에 ‘여성’이 들어가 있어요. 여자들이 주축이 되어 남자들을 계몽시켜서 양성평등을 얼른 가속화시켜야지요."
 ▲현재 한국걸스카우트연맹
총재시기도 하다
-여성할당제는 정말 꿈같은 얘기네요. "프랑스 경우는 할당제에 시비가 붙으니까 헌법을 손댔어요. ‘결과적 참여에 대한 평등에 있어서 여성을 배려해야 한다.’는 문구를 넣었지요. 이 헌법에 기초해서 2000년 선거법이 다 바뀌었죠. 그 결과 여성장관이 22%에서 47.5%가 됐어요. 지금 프랑스 내각의 40~50%가 여성정치인이고요. 서구 중 가장 보수적인 나라가 프랑스인데, 여성운동을 세게 해서 고친 거죠. 제도가 바뀌니 여자도 정치를 하는 구나, 해야 하구나 하고 국민의식이 바뀌었어요."
-여성리더가 많이 나오도록 우리도 제도를 빨리 만들어야할 텐데... "그럼요, 그럼. 이런 게 천천히 바뀌면 쓸쓸하고 우울한 여자들이 많아지게 돼요. 쓰나미가 났을 때, 여자가 죽었을 때와 남자와 죽었을 때가 엄청나게 차이가 났어요. 여자가 죽으면 출산율이 떨어지고, 애들이 밥을 굶고, 사회가 엉망이 돼요. 여자의 희생과 도움 없이는 되는 게 없어요. 21세기의 리더십은 세심함, 봉사하는 마음이 핵심이잖아요? 환경, 의료, 오락, 문화 모든 부문에서 행복하고 삶의 질을 올리는 게 관건이죠. 좌뇌·우뇌를 동시에 잘 활용하는 여자들이 21세기 리더에 훨씬 들어맞으니 여성리더가 많이 많이 나와야죠."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운동이 아직 덜 활발한 듯 싶은데요. "저는 UN 여성지위위원회에 갈 때마다 한국여성인권통계 때문에 고개를 못 들어요. 제가 국회의원 임기 6개월을 남겨두고 가정폭력을 기소할 수 있는 법을 만들려고 발의를 준비한 적이 있어요. 발의를 하려면 의원 스무 명이 서명을 해야 하는데, 남자의원들 아무도 서명을 안했어요. 여자 의원 중 몇몇도 이미지를 생각해서 빠지는 바람에 결국 발의도 못했어요. 이런 일은 여자 국회의원이 많으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헌법 고친 거, 지금의 미국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모두 여성운동의 결실이에요. 우리도 여성운동이 세게 한번 바람이 불어야 해요."
-요즘 여성운동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정치리더십 아카데미를 만들고픈
꿈이 있다고
김 총재가 들려줬던 여성관련 통계와 연구 자료는 지면 상 싣지 못했다. 뉴스에도 나오지 못하는 여성인권문제와 선진국 여성의식 얘길 들으니 씁쓸했다. 행복은 결코 나 혼자 힘으로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인사동으로 나오니,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환하게 웃으며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 웃음이 공허해지지 않도록 여성들 스스로가 빨리 의식을 깨우쳐 연대를 만들어 센 여성운동 바람을 한번 일으켰으면 좋겠다 싶었다.
1989~ 사단법인 한국여성정치문화연구소 설립자 및 이사장
1996~ 2004 제14대, 제15대, 제16대 국회의원
2003~ 현재 아ㆍ태여성정치센터(CAPWIP) 총재(필리핀, 마닐라)
2006~ 한국걸스카우트연맹 총재
2009~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글&사진 위민기자 이정임 |